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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2008. 6. 1. 03:09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Andrei Konchalovsky) <어둠 속의 그들>
33편의 영화를 짧은 시간 동안 몰입해서 봐야 하기에 정신적인 피로도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 영화의 감독 이름만은 잊지 않겠다며 외우는데 신경을 써서 그런지 모든 영화가 끝났을 때 갑자기 중간 장면은 기억이 나는데 앞뒤의 내용이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여주인공이 흑백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생생하지만 전후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하더라. 그리고 어떤 영화의 앞뒤 장면에서 8과 2분의 1 영화 포스터가 여운을 남기며 보여주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중간 장면은 또 기억이 없고, 알고 보니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2분의 1을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를 내용으로 하는 게 바로 이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건 나지만, 그들 각자의 영화관은 영화 속에서 또 이들이 영화를 보니 영화 속에 또 다른 영화가 있어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나는 고전 영화를 선호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여주인공의 눈을 통해서 8과 2분의 1을 보는데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녀가 흘렸던 눈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흘린 눈물에 감동을 받아서 보고 싶다는 게 아닌 아름다운 눈물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이끌 수도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전체 영화를 통틀어 '색감'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고 감독의 유쾌함도 두루 볼 수 있었고 더불어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고전 영화'의 매력에 빠져보고 싶다는 느낌까지 들게 해준 아주 좋았던 영화. 아직도 저 포스터 장면이 아른거린다. 거리에 있는 영화 포스터를 보여준 것이 뭐 그리 기억에 남느냐 하겠지만, 시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듯 관객에게 속삭이듯 그만의 '색채'로 설명해준 짧은 몇 초의 저 장면이 나는 너무도 좋다.



장예모 (張藝謨 , Yimou Zhang)'의 <영화 보는 날>
이 영화를 떠올리면 미소부터 지어진다. 영화 보기 전의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한 소년이 시간이 점점 지나자 기다리다 지쳐 하품하고 결국 밤이 되어 영화는 시작하는데 소년은 그만 잠이 들고 만다.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란 그런 느낌 아닐까, 소년이 품고 있던 것처럼 '설렘'이라는 거. 비록 잠은 들었지만, 소년은 그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겠느냔 말이지. 꾸밈이 없어 좋았고 감독의 순수하고도 따스한 시선은 더욱 좋았다. 단편도 이 정도면 장편은 말할 필요도 없겠구나 싶어서 '천리주단기,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을 시간이 되면 챙겨봐야겠더라. 감동의 도가니로 찌릿찌릿한 느낌보다 물 흘러가듯 잔잔한 감동이 훨씬 좋았다, 가슴 속에 조용히 스며들듯 은은하게 퍼지는 그러한 기분은 오래도록 내 가슴을 울리니까 말이다. 그 점이 바로 이 영화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니까.



기타노 다케시 (Takeshi Kitano)' <어느 좋은 날>
특별할 것 없는 영화지만, '이심전심'의 마음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기분. 영화 속에 동화되고 나면 저 장소는 진짜 어디일까? 허름한 영화관이 이렇게도 매력적이었던 말이야 하고 감탄하면서 드넓게 펼쳐진 저 풍경이 더없이 좋아 보이기만 한다. 그동안 '피와뼈' 영화 하나 때문에 그를 외면하고 지내왔던 시간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기타노 다케시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내게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 영화 속에 등장했던 '키즈 리턴'부터 봐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었다. 솔직히 피와뼈는 너무 했잖아. 나는 그 작품이 당신의 첫 영화였단 말입니다. 좋은 영화 고마워요.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의 <에로틱 영화보기>와 라스 폰 트리에 (Lars von Trier) <그 남자의 직업>은 식스 센스를 능가하는 감독들의 재기 발랄함이 돋보였던 재밌었던 영화였다. 정말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에게 더 고마운 건 영화는 중반부를 치닫고 지루함에 어쩔 줄 몰랐을 때 '펑'하고 터트려줘서 잠이 다 달아났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구스 반 산트 (Gus Van Sant) <첫키스> 감독의 미소년 취향은 정말.. 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감독님이시라니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분명히 구스반산트 감독이라고 예상했고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파라노이드 파크'를 못 보았는데 이동진 기자의 20자 평을 보고 멈칫거렸다. 걷는 자의 뒷모습은 거스 반 산트가 가장 잘 찍는다. 뒷모습이라..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 찍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앞모습보다 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뒷모습'이다. 내 눈으로 얼른 확인을 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켄 로치 (Ken Loach) <해피 엔딩>은 명확하고 깔끔했다.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노장 감독의 연륜을 여지없이 보여줘 텁텁한 가운데 속 시원하게 정리를 해주니 역시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수밖에 없더라. 몇몇 유럽감독들이 너무도 난해한 이야기를 풀어놓으셔서 받아들이기 난감했는데 감독님 덕분에 영화의 마지막을 웃으며 정리할 수 있었다.

왕가위 (王家衛 , Kar Wai Wong)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나 날아왔어요>는 어느 누가 봐도 왕가위이구나 했을 거다. 작품을 접하기 전에 어떤 분이 33편의 평점을 매겼는데 우리 감독님에겐 어떤 점수도 주지 않은 것을 보고 단편에는 그의 힘이 조금은 미약했나 보다 했는데 역시 영화를 보는 눈은 너무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느꼈다. 빨간 구두, 흐릿하면서도 강렬한 붉은 화면, 사람을 숨죽이게 하는 몽환적인 영상에 적잖게 움찔했다. 두근거리기도 했고. 내가 이래서 왕가위 감독을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천상 왕가위 감독빠구나 하면서. 참! 이번에 동사서독 리덕션이 출시되어 조만간 영화관에서 좋은 화질로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내가 동사서독을 처음 접한 건 바로 중학교 3학년 때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그 영화의 깊이를 내가 이해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모든 영화 중에 가장 '지겨운' 영화로 손꼽는데 좋은 화질로 부활한 동사서독은 아름다운 액션과 허무한 대사는 여전히 마음을 울렸고, 14년이 지난 지금 칸에서 상영되는 어떤 영화보다도 혁명적이었다 하는 기사의 구절을 보고 이제는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개봉하는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눈은 자리를 잡았을 테니까. 그리고 장국영의 모습도 다시 볼 수 있으니..

사랑해 파리보다 만족도가 더 컸고 앞으로도 이러한 옴니버스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하고 아시아권 영화가 우리 혹은 내 정서에 잘 맞아떨어지는구나 하고 새삼 느껴버렸다. 상업적인 용도가 짙기보다는 그저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 대한 선물이 아닐까. 그렇기에 코엔 형제의 작품을 못 본 건 아쉽다, DVD에도 없으려나? 다음에 어떤 영화제건 한국 감독도 최고의 상을 받아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다.


posted by 딸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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