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클릭) RSS구독하기

inside 2010. 1. 26. 03:03

출처 : NoiR-k님


고백하건대, 카세 료의 저 목젖, 금방이라도 목젖이 목을 관통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마지막 사진의 애처로운 카세 료를 보는데, 온 몸이 찌릿거리면서 내 심장 박동은 멈출 줄 모르고 쿵쿵. 오직 저 목젖 하나로 내 성적 긴장감은 최고치에 다다랐고 결국은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돼 내게는 자극적이기만 한 카세료의 몸을 탐하고자 영화를 보게 됐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접한 이 영화는 내게 아주 오랜만에 기립 박수를 이끌어냈고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진짜 잘 만들었다' 소리를 내뱉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스틸 컷만 보고서 느낀 성적 흥분이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기에 서두에 당당히 밝힌다.

영화에서 어쩌면 미학적인 요소는 중요할는지 모른다. 동일한 소재의 고통과 극한을 다루더라도 이왕이면 조금 더 예술성으로 승화할 수 있는 군더더기 장치가 필요하니까. 그래야만 평균적인 영화가 아닌 잘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을 테니.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심하리만큼 적나라하게. 한 가정에 여동생이 어느 날 그들의 일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카세 료는 자신때문에 여동생을 잃어버린 거라고 자책했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자해하고 고통의 나날 속에서 끔찍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가족들 역시 그 사건을 계기로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모두들 부표처럼 허공 속을 떠다니게 된다. 고통이란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는가? 쉽게 말해 고통 자체를 외면해버리면 된다. 그러면 비교적 단기간에 훌훌 털어낼 수 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빈껍데기 같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치유 과정을 간과해버렸기에. 자신조차도 감당해내기 힘든 고통의 본질과 직면하지 않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직면하고 고통의 실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말은 쉽다. 누군가를 상실한 고통, 직면한다는 자체가 그 누군가가 이제는 세상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데 어찌 쉬울 수 있을까. 떠난 자를 인정하고 그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작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내 인생이 피폐해진다. 고통을 외면하려한 마음이 크면 클수록.

극중에서 카세 료는 철학과 대학원생인데, 고통의 극한에 이르렀을 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SM 의 타락천사라는 여자에게 문을 두드린다. 카세 료에게는 동생을 잃어버리게 한 피해 의식이 깊숙이 퍼져 있기에 그의 몸은 온통 자해로 난자한 흔적들 투성이다. 자신이 기억하지 않으려 했고 감추려 했던 기억의 저편에 있던 것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위를 통해 떠올림으로써 정말 처절할 만큼 지독하게 괴로워한다. 아직도 끄집어내야 할, 더 고통받아야 할 기억이 남아 있기에 주저하는 순간, 그녀가 '괜찮아, 니 잘못이 아니야' 하고 그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는 모든 기억을 울부짖으며 세상 밖으로 토해낸다. 드디어 외면하기만 해서 자신을 괴롭히기만 했던 고통과 마주한 것이다. 이제 그는 맘놓고 울 수가 있었고 이제는 편안해진 자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 고통을 떨쳐버렸으니까. 2시간 여의 상영 시간 동안 카세 료가 극한의 고통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후반은 이 영화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감히 손꼽고 싶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안테나란 영화가 카세 료의 첫 주연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로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이 아니라, 이 영화로 받았어야 했다. 카세 료는 딱 보기에도 앙상하게 마른 몸, 조금은 어벙해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의 연기 한계는 어디까지인 지 모르겠다. 연기를 단순히 잘 한다가 아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그에게 붙인 다면, 스폰지, 도화지같이 연기라는 영역에 한해서는 무한하게 빨아들이고 표현해 낼 줄 아는 배우다. 내가 지금껏 본 영화 중에 '고통'이라는 감정에 대해 카세 료만큼 있는 그대로, 처절하게 잔인할 정도로 표현하는 배우는 본 적이 없다. 다른 배우들은 역에 맞춰 연기를 잘 소화하는 느낌이라면, 그는 뭐랄까, 그 고통이란 것을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게끔 만들어 그 감정에 완벽에 가까운 동화를 하게 해준다. 어떤 거부반응도 일지 않을 만큼 그의 연기는 늘 자연스럽다. 육체의 극한은 누구나 표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어떠한 과장도 없이 감정의 극한과 사투하는 일은 결단코 아무나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카세 료가 있었기에 최고였다.


우리는 어쩌면 더는 고통받지 않으려고 그 고통을 외면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을 외면한 채 방치해두고 잊으려 할수록 더는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내상이 되어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거다. 응어리를 감추고 있으면 있을 수록. 1차적으로 외부의 고통에 상처입은 후 피하지 말 것. 그리고 2차적으로 스스로 한 번 더 고통을 덜어낼 수 있도록 그 고통의 끝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면할 기회를 줘야만 고통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질 못한다면,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평생의 꼬리표로 남을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고들 하지 않던가.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누군가를 '상실'한 고통의 수위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그 고통을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군더더기 없이 보여준다. 그렇기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묻힌 영화이기에 더 안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 극한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한 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앞으로 닥쳐올 고통의 수위의 정도를 떠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posted by 딸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