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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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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골든 글로브, 정확한 상의 명칭은 'BEST MINI-SERIES / BEST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MINI-SERIES OR MOTION PICTURE MADE FOR TELEVISION'의 작품상과 드류 배리모어에게 여우주연상이 주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시상식에서도 'Long-form TV' 부문에서 작품상을 받았을 정도니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상을 독식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서라도 이 작품을 안 볼수 없게끔 만들더라. 간단히 말하자면, J.F 케네디의 영부인이었던 재클린의 가문, 부비에 집안의 쇠락을 다룬 실화다. 실제로도 70년대에 이 영화의 모태가 된 이디 모녀의 다큐가 만들어지기도 했었고. 재키의 이모인 '이디 부비에 빌'의 화려했던 1936년도의 삶과 몰락해버린 1973년도의 삶을 교차로 다큐형식으로 보여주면서 그들의 삶의 변모 과정을 우리는 지켜볼 수 있다. 상류층의 몰락을 이야기하면 과거의 영예는 뒤로한 채 피폐해져가는 그들을 봐야 하기에 뒷맛은 늘 그렇듯 개운하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들은 이디 모녀, 둘 만이 존재하는 삶을 꾸려나간다. 세상과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디 모녀에게 '우울함'이나 '어두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의 천성적인 엔테테이너적인 요소덕분에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이 영화를 몇 날 며칠 손을 놓지 못하고서 여러 번 보게 된 건 그들 특유의 유쾌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진행 방식도 과거의 이야기는 영화처럼 느껴지게끔 구성했고 현재는 그들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다 털어놓음으로써 몰입하는 재미를 한층 더 살려준다
그레이 가든스는 이디 엄마의 모든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해주는 유일한 끈이며, 바로 여기에서 자신이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던 노래를 불렀던 공간, 그렇기에 생이 절박한 가운데에서도 그레이 가든스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삶으로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으되 모든 추억이 된 이 공간만큼은 절대 버릴 수가 없었던.. 이디 엄마에게 이러한 의미의 공간이었다면, 이디 본인에게 그레이 가든스는 어떤 의미였을까? 늘 자신이 꿈꿔왔던 노래와 춤을 할 수 있는 배우가 될 기회는 여러 번 찾아왔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녀를 이 공간으로 불려 들었고 '엄마는 너를 필요로 해' 라고 생각하지만, 본인도 자신과 너무도 닮아 있는 엄마, 앞으로 나아가야 할 순간마다 자신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번번히 그렇게 자신의 꿈은 좌절된다. 이 애증어린 모녀 관계 역시도 이 영화를 보는 묘미에 한몫을 톡톡히 한다.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서로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공생 관계에 있는 특별한 이디 모녀였으니까. 드디어 이디 모녀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의 시사회가 열리고 어쩌면 이디에게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기회가 찾아온다. 시사회에 가지 않겠다며 또 그 기회를 놓쳐버리려는 순간에, 엄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더는 그레이 가든스 울타리 안에서의 삶이 아닌 더 넓은 세상 밖으로 갈 수 있도록 그녀를 놓아준다. 자신이 꿈꿔오던 시사회장에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삶을 시작하는 이디외 모습은 진정으로 아름답고 멋졌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공연장에서 이디가 tea for two 음악에 맞춰 엄마와 늘 함께 잘 추었던 소프트 슈(징 없는 신발을 신고서 추는 탭댄스)를 보여주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고서 그녀가 가진 끼를 다 발산하는 그 아름다운 장면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기억에 남을 만한 명대사도. 현재의 이디가 말한다. It's very difficult to keep the line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드류 배리모어의 연기에 또 한 번 감탄해버린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극중 이디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가 다 빠지는 병을 앓고 있다. 포스터 속에 보이는 드류 배리모어의 모습은 늙은 분장을 한 현재의 모습. 예쁘디 예쁘기만 한 여배우인데, 세상에 어떤 배우가 화면 속에 비춰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버리고서 저런 역할을 감히 수락할 수 있을까. 열연했기에 골든 글로브 수상도 당연한 결과고 묘하게도 실제 주인공과도 꽤 많이 흡사하다. 그레이 가든스에 빠져들면서 내가 알던 그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직 극중 '이디'만이 존재했으니까. 배우로서의 끼도 넘쳐, 이번 달 18일에 개봉하는 '위핏'의 감독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주는 그녀는 정말 최고다. 극장에서 개봉을 해주리라 생각하지만,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니까, 이웃분들도 꼭 한 번 보시길. 저역시, 개봉하면 또 보러 갈 거고 애정어린 리뷰를 작성했으니 이제 안녕을 고하고 다른 영화로 넘어가야 하는데, 여운의 폭이 넓은 영화를 오랜만에 만나서 안녕하기가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정말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 감격에 못 이겨 모든 감정을 쏟아낸 후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레이 가든스처럼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여러 날을 함께 했음에도 좀처럼 다른 영화로 발걸음이 옮겨가지 않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영화가 있어요. 오늘 밤도 또 그레이 가든스 보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3일 동안 계속해서 본 것도 아쉬운 마음에 한 번만 더 보자 한 게 그렇게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