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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2007. 10. 22. 12:44
어쩌면 영양제와 닮은 것은 화장품이 아니라 남자인지도 모른다. 서른을 넘어서면 화장품은 필수품이 되지만 남자는 그 정도까진 아니다. 기한이 다 되면 쓰레기통에 던져넣거나(던져지거나) 하는 것도 똑같고, 이것저것 시험해 보지만 결국 결정적인 나만의 제품과는 만나지 못한 느낌이 드는 것까지 똑같다.

두 사람은 동시에 짧게 웃었다. 아사요는 오른손의 검지를 들어 도시키의 볼에 A라고 쓰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 이니셜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입술로 봉인했다.

누군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함께 고민하고 싶어지는 것. 그만큼 상대에게 끌리고 있다는 증거일까?

무미건조한 생활에 물기를 더해줄 뭔가가 없을까?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온 몸에 행복의 비를 뿌려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이 식물들에게 주는 물처럼 그저 약간의 물기를 더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없을까? 바싹 말라붙은 마음의 표면이 촉촉하게 젖을 수 있을 정도로 그저 약간이면 되니까.

가족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학생시절의 추억 이야기, 이미 몇 번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말할 때의 신선함. 하나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저 기뻤다.

다케히로는 의외로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며 열심히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얼마 전까지 사귀던 남자에게는 바로 이 부분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시끄럽다고 말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상대방의 말에 신중히 귀를 기울여주는 자세. 두 시가 지난 한밤중에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웃었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듯 기분이 좋아진다. 심야의 전화는 왜 이렇게 즐겁고, 상대가 더 가까이 느껴지는 걸까? 상대의 얼굴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리다 보니 마음과 마음을 직접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사람이다 싶은 남자에게는 꽤 적극적 이어진다. 십대때부터 지아키의 연애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란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에 잘 먹혔던 기술을 질리지도 않고 언제까지고 우려먹는 것. 아무리 실패를 거듭해도 그렇게 많은 기술을 몸에 익힐 리는 없는 것이다. 사랑에는 0아니면 1밖에 없다. 상대와 헤어진 순간 모든 것은 리셋 된다. 지아키가 느끼고 있는 이 설렘도 첫사랑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그렇듯 잡학에 강한 남자에게 약한 편이었다.

<러브 스토리>란 영화였나요? 대학생 커플이 좁은 소파에 껴안고 누워서 각자 다른 책을 읽는 장면이 있었죠? 저한테는 그게 가장 눈부신 연애의 이미지였어요. 그 영화를 처음 본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읽는 내내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었던..내가 하고싶은 말을 작가가 대신 해주고 있었던..

평일에는 '시험을 위한' 책과 씨름하고 있기에 짜투리 시간에 책을 보자니 나를 위해 춤추고 있는 글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주말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책을 보자 했었다. 예전에는 단편이 연장선상에 놓여진 글의 흐름을 끊어놓는 느낌 때문에 선호하지는 않았었던 것 같은데 단편 영화들을 접하면서 취향이 바뀐 것인지 오래전 '로맹 가리'님의 단편을 선물해준 동생 덕분인지 단편의 매력을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짧은 흡입력 속에서 최대의 효과를 보여준다고 할까? 물론 한 편이 끝난 뒤 다음 작품을 위해 긴 호흡을 내쉰 뒤 이전의 글에 대한 향취는 잊어야하는 수고스러움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쯤은 충분히 해줄 수 있지요.
취향이란 것이 무엇인지 한 작가의 섬세한 필력에 반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단편집들을 모조리 읽어준 후 장편에 손을 댄다.

+ 어제 CD 속에 정리 안된, 흩어져있던 스캔사진들을 컴퓨터 속에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보니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이 역력하더라.
그 때는 이 사람은 내 타입은 아니야 하고 단정지었고 매몰차게 거절했었고. 지나간 사랑이 아쉬운 감정이기 보다 어려서 잘 몰랐던,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잘 아는.. 물론 가슴 벅차도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원하지, 그가 곁에 있으면 행복할 것만 같은 남자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건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긴 한 건데..
똑똑하게 사랑하는 법. 완벽한 남자는 세상에 없으니 80%정도를 갖춘 사람을 고르되 모자란 20%는 자신이 채워라.
간단하지만 정곡의 이 방법이 내게는 어려워요..

저 책 속에 등장했던 눈부신 연애의 이미지.. 가슴 한 구석에서 조용히 꿈꾼 모습이기는 했는데 한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볼에 이니셜을 그린 후 입술로 봉인하는 그 장면은 읽으면서 내내 참 이쁘다.. 하고 설레게 했던..
동거를 하고 있던 그와 그녀는 자신이 구입한 물건에 자신들의 이니셜을 적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던 커플이었거든.
posted by 딸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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